마에다(前田)는 1878년 아오모리현 나카쓰가루군 후나자와무라의 부유한 농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소년 시절에는 이미 쌀가마니 2가마를 가볍게 들어올려 궁씨름등에서 그 솜씨를 발휘했다고 한다.1896년 아오모리현 심상중학을 2년 만에 중퇴하고 가출이나 다름없이 상경해 갓 창립된 와세다중학교에 편입했다.그곳에서 유도를 만나 이듬해 강도관에 입문한다.그 이듬해 말에는 무단자끼리의 3판 승부로 치러지는 월차 승부에서 검은띠 직전의 형제자들을 차례로 던져 최종적으로는 10명 빼기를 해낸다.이때부터 마에다의 이름은 강도관내에서 서서히 알려지게 되었다.도쿄전문학교(현 와세다대)에 입학한 마에다는 1901년(메이지 34)에는 3단까지 승단해 가쿠슈인과 육군 유년학교 등에서 유도를 가르치게 된다.강도관 내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어 가노 지고로로부터 직접 지도를 받은 고제가 '강도관 사천왕'으로 불렸던 것을 참고로 그 차대를 담당하는 것으로 굉소타, 사무라 가이치로와 함께 '강도관 삼우카라'로 칭해졌다.
1907년 강도관 사천왕 중 한 명인 토미타 죠지로가 강도관에서 미국으로 파견되어 유도 보급 활동을 하게 되었고, 체력의 전성기를 지난 토미타의 동반자로 당시 가히 기세를 올리고 있던 마에다가 선정되었다.늘 대륙으로 건너가 마적이나 해적이 되고 싶다며 대륙웅비의 꿈을 말하던 마에다에게 바로 건너가자는 배의 권유였다.
우선 두 사람은 미국 동해안부터 보급활동을 시작해 육군사관학교와 컬럼비아대에서 형식과 연습경기를 갖고 입문자를 모집했다.연습경기에서는 키 164cm, 몸무게 68kg으로 일본인으로서도 덩치가 크지 않은 마에다를 보고 편안하게 이길 수 있다고 밟은 덩치 큰 풋볼 선수와 체조 교사가 도전해 왔지만 자랑스러운 허리의 힘과 상대의 힘을 이용한 던지기 기술 등으로 이를 물리쳤다.이런 활동과 1908년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데 따른 일본 붐·유술 붐이 일었고 입문자 모임도 나쁘지 않았다.하지만 훈련에서 던지는 것을 힘들게 해서인지 반복이 많은 단조로운 연습을 싫어해서인지 오래 가는 것이 좀처럼 없었다.또 붐에 편승한 일본인 가짜 유도가들이 각지에서 레슬러에게 승부수를 던지며 무참히 패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도 마에다 등에게 골칫거리였다.
서해안으로 활동장을 옮긴 도미타와 떨어져 동해안에 머문 마에다는 이들 문제를 해결하고자 신문에 광고를 내고 적극적으로 레슬러 등의 도전을 받아 공개 승부를 벌이기로 했다.미국인이 진짜 유도를 보게 해 유도의 실전에 있어서의 유효성을 홍보하려고 생각한 것이다.첫 공개 승부는 부처보이라는 프로레슬러로 182cm, 113kg의 거한이었지만 첫 판은 파투, 뒷던지기 같은 던지기 기술에서 핀폴을 터뜨렸고 두 번째 판은 팔 관절을 뚫고 완승을 거뒀다.이제부터 시작될 세계를 누비는 이종격투 행각의 기념할만한 1차전이었다.이종격투 때문에 규칙이 매 경기 달라져 유도복 착용을 상대로 거부당해 반나체의 레슬링 스타일로 싸워야 할 때도 있었지만 유도복을 착용한 경기에서는 천 경기 패배가 없었다고도 한다.
이후에도 미국 각지에서 공개경기를 치르며 유도 선전에 나섰으나 보급 활동의 결과는 좋지 않아 결국 미국을 단념시키고 1907년 영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영국에서는 유도의 이름이 이미 알려져 있고, 교실을 열면 미국과 달리 열성적인 입문자들도 있었다.영국에서도 마찬가지로 각지에서 강연회와 공개 승부를 벌이는가 하면 당시 한창 열리기 시작하던 레슬링 대회에도 참가했다.그러던 중 처음으로 복서와의 대전도 실시해, 이것에 승리하고 있다.이때 취한 전법은 얼굴과 구미를 보호하면서 몸을 굽혀 빠르게 돌진하고 상대의 발을 잡고 쓰러뜨린 뒤 팔 관절을 끝내는 것으로 발리 투드의 그레이시 유술 전법의 원형이 이곳에서 이미 완성돼 있었다.
벨기에 프랑스 등에서도 경기를 치른 뒤 초청받아 스페인으로 건너가 이곳에서 콩데코마의 별명이 생긴다.마에다가 바르셀로나에 들어간 곳, 일본인 유도 챔피언을 칭하는 것이 강연회를 한다는 광고를 보았는데, 그것은 마에다도 이미 알고 있는 인물로, 도저히 챔피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실력의 소유자는 아니었다.그래서 이것을 응징하려고, 마에다라고 알려져 도망칠 수 없도록, 별명을 자칭해 대전을 도전하게 되었다.좀처럼 좋은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곤란하고, 또 그 무렵 돈이 부족해서 곤란하다고 해서 「마에다 코마루」라고 처음에는 생각났지만, 거기서 「코마」만 따서 스페인어로 「백작」의 의미인 「콩데」를 먼저 붙여, 맑게 「콩데 코마」의 탄생이 되었다.콩데·코마로서 승부를 건 마에다였지만, 상대도 금방 마에다라는 것을 깨닫고, 승부에서는 도망치고 말았다.그러나 이에 질린 이 인물은 유도챔피언을 자처하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
그 후 마에다 자신도 외무성의 촉탁이 되어 아마존 정착을 위한 국책 남미척식회사가 설립되자 그 현지 대행회사의 감사역이 되었다.게다가 우에츠카 츠카사 등에 의한 아마조니아 산업이 설립되자, 그 이사가 되어, 주정부와의 교섭과 정착민들을 돌보느라 분주했다.
그러나 그런 마에다의 생각과는 달리 아마존 유역에서의 농지 개간을 목표로 한 일본인의 정착 시도는 난항을 겪었다.아마존 정착민들을 베렌으로 맞아 돌아오지 말라고 공들여 정착지로 내보내는 마에다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꿈이 깨져 돌아오는 이들이 줄을 이었다.그럴 때 돌아온 정착민들에게 슬픈 얼굴로 화를 내는 기색은 보이지만 결국 집으로 데려가 식사를 하고 벨렌의 거리 일을 돌보기 일쑤였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베렌에 거처를 정하고 나서 20년 가까이를 아마존 정착 사업에 바친 마에다였지만, 그러는 사이에 지병인 신장병이 재발해 1941년(쇼와 16) 11월, 마침내 아마존의 발전을 그 눈에 보이지 않고 63년의 생애를 마감했다.그 장례식에는 벨렌 시가에서 묘지까지 가는 길을 벨렌 중인 자동차들이 줄을 서서 관을 배웅했다.결국 도미타와 함께 도미한 이래 마에다가 다시 조국 일본의 땅을 밟지는 않았다.베렌에서 사설 대사와 같은 존재가 된 뒤에는 일본 정부 소식통으로부터도 귀국 제의가 있었지만 자신의 신념인 아마존 정착이 길바닥이어서 그런지 현지 가족을 생각해서인지 망향에 사로잡히면서도 계속 권유를 거절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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